국립세계문자박물관 특별전: 책의 역사를 바꾼 '알도 마누치오' 관람 후기
대한민국 인천 송도의 센트럴 파크에는 아주 독특한 박물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인데요. 평소 기록과 문자에 관심이 많아 항상 궁금해하던 곳이었는데, 이번에 아주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출판인, <천천히 서둘러라: 알도 마누치오> 특별전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알도 마누치오가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현대의 책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보와 제가 직접 다녀온 생생한 후기를 함께 담았습니다.
1. 알두스 마누티우스? 알도 마누치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신 분들은 조금 헷갈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검색창에는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 라는 이름이 더 자주 등장하거든요.
사실 두 이름은 동일 인물입니다.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라틴어식 표기이고, '알도 마누치오(Aldo Manuzio)' 는 그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 원음 발음입니다. 마치 '시저'와 '카이사르'의 차이 같죠.
이번 전시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이탈리아의 로마 국립중앙도서관, 국립마르차나도서관과 협업하여 진행한 전시입니다. 이탈리아 현지의 숨결을 그대로 가져온 만큼,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탈리아식 이름인 '알도 마누치오'를 공식 표기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저도 이 글에서는 '알도'라고 부르겠습니다.
2. 관람 후기: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마침내 만난 혁명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전시를 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야지, 가야지..." 마음만 먹고 미루다가 문득 날짜를 보니 전시 종료가 임박했더군요! (1월 25일이라니!)
"오늘 안 가면 평생 후회한다!"라는 생각으로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송도로 향했습니다.
🎧 도슨트와 오디오 가이드, 정보의 홍수
무료 전시라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퀄리티가 상당했습니다. 현장 도슨트 분의 열정적인 설명과 '윌라' 오디오 가이드를 병행하며 들었는데, 정말 정보가 '고봉밥'처럼 꽉꽉 눌러 담겨 있더군요. 2시에 도착해서 윌라의 설명을 듣다가 3시 도슨트 부터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폐관 시간인 6시 안에 다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알도 마누치오라는 인물이 인류 지성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그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3. 알도 마누치오, 그는 무엇을 바꿨나?
단순히 "옛날에 책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책의 형태와 독서 습관, 그 모든 것의 시작점에 알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전시에서 메모해 온 핵심 혁신 포인트 4가지를 정리해 드립니다.
① 검색의 혁명: 장(Leaf)에서 쪽(Page)으로
500년 전, 책은 '쪽 번호'가 없었습니다. 그냥 종이의 장수만 셌죠. 알도는 책을 펼쳤을 때 양쪽 면에 모두 숫자를 매기는 '쪽 번호(Pagination)' 를 대중화했습니다.
이게 왜 혁명이냐고요? 쪽 번호가 생기면서 비로소 '목차' 와 '색인(Index)' 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만 했던 책이, 필요한 정보만 쏙쏙 찾아낼 수 있는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 로 진화한 순간입니다.
② 시각의 혁명: 이탤릭체와 문장 부호
컴퓨터의 기울임꼴(Italic) 버튼, 우리가 매일 쓰는 쉼표(,) 와 세미콜론(;) 도 알도의 인쇄소에서 정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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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탤릭체: 사실 멋을 부리려고 만든 게 아니라, '가성비' 때문이었습니다. 좁은 종이에 더 많은 글자를 욱여넣기 위해 폭이 좁은 서체를 개발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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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부호: 소리 내어 읽는 호흡을 표시하던 부호를, 눈으로 읽고 논리를 구분하는 용도로 바꿨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만 읽는 '묵독' 이 가능해졌습니다.
③ 하드웨어의 혁명: 책을 '모바일 기기'로 만들다
알도 이전의 책은 도서관 책상에 쇠사슬로 묶인 거대한 가구였습니다. 알도는 전지 한 장을 8번 접어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8절판(Octavo) 문고본' 을 만들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주석을 빼고 본문만 담아 가격을 낮추고 휴대성을 높였죠. 침대에서, 여행지에서, 공원에서 책을 읽는 풍경. 오늘날의 '개인 독서 문화' 는 알도의 이 작은 문고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④ 지식의 보존: 그리스 고전의 구원 투수
알도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이자 '덕후'였습니다. 라틴어 문법책을 직접 쓸 정도로 지식이 깊었던 그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그리스어 원전을 모아 정확하게 복원하고 인쇄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르네상스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4. 알디네(Aldine) 가문의 유산
전시 후반부에는 알도 사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의 인쇄소 '알디네'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유럽 전역에서 '알디네 짝퉁(위조판)'이 판을 쳤다고 합니다. 심지어 알디네 측에서 "이 책은 진품입니다"라는 경고문을 넣어야 할 정도였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가업을 이어받았는데, 특히 바티칸 교황청의 요청으로 만든 '클레멘스 성경(1592)' 은 이후 400년 동안 가톨릭의 표준 성경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비록 손자 대에서 인쇄소 문은 닫았지만, 그들이 만든 책의 표준(폰트, 판형, 편집 방식)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습니다.
5. 마치며: 책의 미래를 묻다
"좋은 책들을 거칠고 어두운 감옥에서 해방시키다."
- 알도 마누치오
전시장을 나오며, 알도가 했던 이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는 지식을 소수의 특권층에서 해방시켜 우리 모두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텍스트에서 영상으로 매체는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을 나누고 퍼뜨리려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알도 마누치오가 500년 전 '책'이라는 하드웨어를 혁신해 세상을 바꿨듯, 지금 우리는 또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나누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인천 송도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거리만 가깝다면 정말 자주 가고 싶은 곳이네요. 혹시 아직 방문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신다면, 다음 기획 전시라도 꼭 챙겨 보시길 추천합니다!
📍 국립세계문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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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인천 연수구 센트럴로 217 (송도 센트럴파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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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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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 박물관 주차장 이용 가능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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